여행을 통해 생긴 피로를 흔히 여독(旅毒)이라고 한다. 두 달이 넘는 긴 여행을 했던 내게 남은 여독이란 어떤 것일까?
지난 두 달 간 행로는 인천-홍콩-런던-이스탄불-안타키아 처음 도착한 곳은 안타키아라는 작은 터키의 도시였다. 이틀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이곳에서 나는 이미 한국에서 알고 지냈던 터키 큐레이터, 아르주를 만났고 안타키아 비엔날레에 나와 함께 참여하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 '공동생활'이 시작됐다. 안타키아에 있었던 동안은 그야말로 비엔날레를 준비하고 이에 대한 긴장과 일에 대한 스트레스 등으로 지쳐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시간을 같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했다. 단체생활이 주는 재미있는 지점들을 조금씩 만끽하면서 동시에 이스탄불과 같은 큰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을 작은 도시의 풍경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안타키아를 떠나 이스탄불에서 시작된 새로운 터키 생활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사교적인 일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런 사교적인 일에 지겨워질 때 즈음 해서 나는 다시 터키 서부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에페스나 셀주크와 같은 고대 도시들부터 파묵칼레나 카파도키아와 같은 자연 광경은 터키에 온 여느 다른 관광객들과 다름 없는 내 자신을 일깨워주기 충분했다.
다시 이스탄불에 돌아 왔을 때, 다시 아르주와 함께 또 사교적인 일들이 시작되었는데 미술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익숙해질 때 즈음 해서 다시 이스탄불을 떠나야 할 시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컨퍼런스가 끝난 다음 날 터키를 떠나 벨기에로 가면서 이 나라는 다시 한번, 아니 꼭 다시 와서 오랫동안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르주는 이스틱랄 거리를 반쯤 걸어오다가 아무래도 우리는 여기서 이별을 작고 해야 겠다고 했다. 내가 생각해 봐도 우리가 탁심 광장까지 같이 걸어 갔다가는 많이 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벨기에에 도착한 후, 조용하기 짝이 없는 일주일을 지냈다. 터키에서 만났던 작가들, 큐레이터들을 다시 만나 조우하기도 했고, 처음 만나는 작가들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들도 나누고, 큐레이터들이 소개시켜준 또 다른 큐레이터를 만나 런던에서 어떤 일을 할 지 일정을 정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비가 참 많이도 왔다. 그렇게 많이 오던 비는 결국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수시켰고, 나는 커피숍에서 신문을 보고서 그제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샤를르와에서 더블린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뭔가 집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거의 9개월에 가까운 시간을 아일랜드에서 보낸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고, 또 그대로였다. 록산나와 만나 밀타운으로 가는 길도 그냥 아무 다를 바 없이, 거리의 빛도 비가 오는 그 모습도 모두 다 그대로였다. 템블바에 모이는 관광객들도 그대로였고, 거리도 모두 젖어 있었다. 그대로였다. 물론 코크로 내려 갔을 때는 더더욱 그대로였다. 모두 그대로였고, '웰컴 홈'이라는 말로 나를 반겨주는 코크 사람들이 놀라우리만큼 그대로였다. 나만 바뀌고 모두들 다 그대로 있는 시간이 멈춰버린 느낌이었다.
코크에서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처음 온 영국이라는 나라가 익숙한 이유는 모두 다 호주에서 1년 간 살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다 호주와 같았다. 그냥 좀 더 추울 뿐이었고, 좀 더 오래 된 듯 할 뿐, 계속 호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템즈 강은 야라강만큼이나 작아 보였고, 빅벤의 감동도 사진에서 보는 것만큼 크지 않았다. 이게 영국이구나, 참 네가 뭐길래 하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고, 영국식 억양을 들을 때마다 그 전에 만났던 영국 친구들이 생각났다.
그러다가 일본을 오니, 집에 온 기분이었다. 다시 아시아로 돌아온 기분은 그야말로 집에 도착했구나 하는 기분. 일본은 어찌나 한국과 이리도 비슷할까, 그런데 생각은 참 많이 다르다. 우리는 정말 비슷하지만, 같아질 수 없는 두 존재라는 생각.
이제 다시 내가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낸 고향으로 돌아왔다. 바다는 그대로 파도를 치고 있고,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누가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지 어떤 음식이 가장 맛있는지 건강에 좋은지 등이다.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온 이 기분-여독과 어우러져서 약간은 거리감을 만든다. 진짜 내가 여기서 내 인생의 19년 간을 보냈었는지.....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여독을 확실이 풀어야 할 의무를 느끼지만, 그 방법은 주로 못 읽었던 소설을 읽거나 부모님과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거나 또는 지역 특산물을 먹으러 다니거나 하는 또 다른 여행들이다. 여행은 멈추지 않는 매일이, 여행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
Please leave your comment.